삶은 본래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공간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누구도 선택하지 않은 시공간에 던져지고, 어느 날 문득 ‘왜 살아야 하지?’라는 물음을 마주하게 된다.
이 물음은 단지 철학자나 종교인의 것이 아니다. 삶에 상처 입은 이들, 무기력과 우울 속에서 허우적대는 이들, 치열한 일상에 잠식당한 이들이 조용히 되뇌는 가장 근원적인 질문이다.
우리는 이 질문에 정면으로 답하고자 한다. 단순한 추상이나 낭만적 위안이 아니라, 실존을 통과한 사유와 실천을 바탕으로 말이다.
그 여정에서 우리는 세 인물, 심리학자 알프레드 아들러, 철학자이자 작가 알베르 카뮈, 그리고 기업가 일론 머스크를 불러낸다.
1. 아들러: 열등감을 넘어 타인과 공동체를 위한 삶으로
알프레드 아들러(Alfred Adler, 1870–1937)는 프로이트와 함께 심리학의 초석을 다진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무의식이나 성적 본능보다는 인간의 ‘사회적 연대’와 ‘목표 지향성’을 중심에 놓았다. 아들러는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어떤 ‘열등감’을 품고 있으며,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곧 삶의 원동력이라고 말했다. 중요한 것은 이 열등감을 어떻게 다루느냐이다. 어떤 이는 이를 통해 자기 우월을 추구하고, 어떤 이는 타인과의 협력을 통해 사회적 유익을 추구한다.
당신의 삶이 공허하고 세상이 괴로운 곳으로 느껴진다는 것은 세상의 중심에 ‘자기 자신’만을 놓고 비교와 경쟁관계 속에서 존재의 이유를 찾으려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일정기간 어머니 없이 생존할 수 없는 존재이고 성장하면서 타인과의 협력없이 살아남기 어려운 실체이다. 그러나 그 협력의 과정에서 느끼게 되는 상대적 우열과 열등감을 극복하려는 힘이 삶의 원동력이 되지만 스스로 완벽해짐으로서 공동체 속에서 우위에 서는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게 되면서 타인과 공동체는 수단이자 적으로 전락해 버린다. 이처럼 열등감을 극복하는 과정을 경쟁속에서 실현하기 때문에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회의가 찾아오는 것이다. 인간은 완벽한 존재가 될 수 없으며 홀로는 생존할 수 없는 사회적 존재라는 것은 명확하다. 타인과의 협력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스스로 완벽해 질 수 있다는 목표는 불가능한 것이며 개념 자체가 허구이다.
아들러의 사상을 삶의 이유로 전환하면 명확해진다. “우리는 열등함을 극복해 타인과 공동체에 기여하기 위해 살아야 한다.” 아들러는 『인간이해의 열쇠』에서 진정한 정신 건강은 ‘공동체 감각’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크건 작건 자신이 가진 것으로 누군가를 돕는 순간, 우리는 존재의 이유와 기쁨을 발견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인생이 어렵다면, 그것은 당신이 아직도 자신만을 중심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삶이 무거운가? 그렇다면 방향을 바꿔야 한다. 자기 자신에서 타인으로. 경쟁에서 협력으로. 비교에서 기여로. 아들러의 관점은 우리에게 말한다. 우리가 살아야 하는 이유는 ‘나 자신을 증명하기 위함’이 아니라, ‘타인의 삶에 의미 있는 흔적을 남기기 위함’이라고.
“타인에게 기여할 때, 우리는 존재의 이유를 찾을 수 있다”
2. 카뮈: 부조리한 세계에서 반항으로 의미를 만드는 인간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는 부조리의 철학자이다. 그는 『시지프 신화』에서 인생의 본질이 ‘부조리(absurd)’라고 선언한다. 인간은 의미를 갈망하지만, 우주는 무관심하다. 우리는 사랑하지만 사랑하는 존재도 죽고 나도 죽는다. 우리는 이해하려 하지만, 세계는 설명되지 않는다.
이런 부조리 속에서 많은 이들은 자살을 떠올린다. 카뮈는 바로 이 지점에서 묻는다. “우리가 죽지 않아야 할 이유가 있는가?” “인생은 살 가치가 있는가?”
그의 대답은 놀랍도록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한다.” 그것은 체념이 아니라 ‘반항’이다.
카뮈는 말한다. 부조리를 직시하되, 굴복하지 말라. 무의미한 세계 속에서 자신만의 의미를 창조하는 인간, 그것이 진정한 ‘반항하는 인간’이다. “자살은 부조리에 대한 도피지만, 반항은 그것에 대한 응전이다.” 무의미에 반항함으로서 의미와 의지는 알을 깨고 탄생한다.
카뮈에게 있어 삶은 완성되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 무의미함에 맞서 자신만의 삶의 윤곽을 그려가는 ‘예술가적 행위’에 있다. 그는 말한다. “자유로운 인간은 자신을 창조하는 인간이다.” 우리가 의미를 만드는 순간, 삶은 부조리 속에서도 빛을 낸다.
우리가 무의미한 세계를 받아들이고 살아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인간만이 부조리에 대한 반항 자체로 빛을 내고 윤리와 가치를 창조하는 존엄함을 구현해 내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완성된 의미는 없다. 인간은 의미를 ‘발견’하는 존재가 아니라, 창조하는 존재다.
삶은 주어진 것이 아니다. 삶은 그리는 것이다.
삶은 해석이 아니라 창작이다.
그 부조리와 무의미에의 반항이 질서를 만들고, 의미를 탄생시키며, 어두운 우주에 빛을 던져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힘차게 부조리에 맞서 살아야 한다.
3. 머스크: 상상력과 실행을 통해 인류를 진보시키는 삶
일론 머스크(Elon Musk, 1971–)는 21세기의 가장 논쟁적인 기업가이자 비전가이다. 테슬라, 스페이스X, 뉴럴링크, 스타링크 등 그의 이력은 단순한 비즈니스가 아니라, 인류의 미래를 재구성하려는 거대한 실험이다. 그는 자주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인류가 다행성 종이 되길 바란다. 그것은 인류 전체의 생존과 진보를 위한 필수 조건이다.”
머스크는 자본주의 안에서 작동하는 기업가이지만, 그의 삶의 동력은 이윤이 아니다. 그것은 명백히 ‘미래를 향한 신념’이다. 그는 『일론 머스크, 미래의 설계자』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우주적 관점에서 너무 미미하다. 하지만 그 미미함 속에서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그에게 삶의 의미는 ‘가능성을 확장하는 것’이다.
삶의 이유는 때로 나를 넘어선다. 우리는 하나의 세포처럼, 더 큰 유기체를 위한 역할을 할 수 있다. 머스크는 기술을 통해 인류 전체의 생존과 문명의 진보를 추구한다. 그것은 단지 위대한 목표가 아니라,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질문이다. “나는 내 능력으로 인류에게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까?” 머스크는 그것을 가장 급진적으로 실천하는 인물일 뿐이다.
우리가 살아야 하는 이유는 ‘존재의 가능성을 확장하는 일’에 있다. 상상하라. 도전하라. 실패하라. 그리고 다시 시도하라. 머스크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에게 실패는 살아 있다는 증거이며, 진보의 원동력이다.
머스크는 삶의 이유를 ‘인류 전체의 미래를 위한 기여’로 확장한다. 그에게 있어 살아야 하는 이유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상상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비록 실패하더라도, 도전 자체가 미래 세대에게 새로운 이정표가 되며 존재해야 할 이유가 되고 존재의 의미가 되는 것이다.
개인을 넘어서 사람과 공동체와 미래로
우리는 왜 살아야 하는가? 세 인물의 통합적 메시지
| 인물 | 삶의 의미 |
| 알프레드 아들러 | 열등감을 극복하고 타인에게 기여하는 삶 |
| 알베르 카뮈 | 무의미를 받아들이고 의미를 창조하는 삶 |
| 일론 머스크 | 인류의 미래를 위해 도전하는 삶 |
“삶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며, 타인과 공동체를 위해, 미래의 지평을 넓히며 살아가는 그 자체가 빛나는 별과 같은 삶이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해야 한다.
“나는 누구에게 기여하고 있는가?”
“나는 어떤 의미를 창조하고 있는가?”
“나는 어떤 미래를 꿈꾸고 실현하고 있는가?”
삶의 의미는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관계 맺는 사람들 속에, 내가 그려내는 비전 속에, 내가 감당하는 불확실성 속에 있는 것이다.
아들러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카뮈는 무의미에 대한 반항 속에서, 머스크는 인류적 비전 속에서 삶의 이유를 찾는다. 이들은 서로 다른 시대와 배경에서 살아갔지만, 공통의 메시지를 던진다. “삶은 스스로 의미를 창조하는 여정이다.”
우리는 주어진 환경 속에서 스스로 이유를 만들 수 있다. 열등감을 극복하고, 부조리를 직시하며, 미래를 상상할 수 있다. 살아야 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지 않다. 그것은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누군가는 질문한다. “왜 살아야 하죠?” 그 질문에 오늘 우리는 이렇게 답한다.
“당신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스스로 의미를 창조하며, 인류의 미래에 작은 불씨라도 보탤 수 있다면, 그것으로 삶은 충분히 살아갈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니 살아가자. 타인을 위해, 자신을 위해,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위해. 그렇게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이유’가 되어 살아간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더라도 괜찮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그 이유를 스스로 만들어가는 과정이니까. 때로는 울고, 때로는 웃고, 때로는 함께 춤추다, 때로는 침묵하며 다른 사람과 함께 미래를 향해 나아가라. 그 자체가 삶으로 가득 찬 빛나는 별인 것이다.
아들러(Alfred Adler), 카뮈(Albert Camus), 머스크(Elon Reeve Musk)는 어두운 밤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길잡이 별이 될 것이다.


